거침없이 자유로운 시적 발상,
몸의 언어로 구현되는 즐겁고 빛나는 해방구!
감각과 경험으로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해온 장인수 시인의 신작 시집
슬픔 속에서도 삶의 찬란한 순간을 발견하는 시
생명성의 불꽃으로 가는 도화선, 저 밝은 몸의 길, 생명성의 분출
장인수 시인의 신작 시집 『슬픔이 나를 꺼내 입는다』가 출간되었다. 『슬픔이 나를 꺼내 입는다』는 시인이 일상 속에서 발견한 철학적 사유와 감각적 표현이 가득 담긴 작품이다. 장인수 시인은 독창적인 시세계를 펼쳐왔으며,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 특유의 감각적 언어와 철학적 깊이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해설을 맡은 오민석 문학평론가는 장인수 시인의 시가 “생명성의 불꽃으로 가는 도화선”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는 장인수 시인이 슬픔 속에서도 삶의 찬란한 순간을 발견하고, 이를 시로 표현하는 능력을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 장인수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목련나무의 하얀 울음”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 속에서도 찬란한 찰나가 있음을 강조하며,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한다.
누구에게나 관념과 감각이 존재한다. 관념과 감각 사이의 거리에 따라 사유와 정념의 좌표가 생겨난다. 관념의 축으로 아주 멀리 간 주체들을 우리는 관념주의자라고 부른다. 관념주의자들은 감각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감각은 일시적이고 변덕스러운 좌표이다. 감각의 축으로 멀리 간 사람들을 우리는 감각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관념보다 몸의 신호들을 훨씬 더 신뢰한다. 이들에게 진실은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관념과 감각이 항상 대척적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관념적 감각 혹은 감각적 관념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 장인수의 사유와 정념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그는 머릿속의 관념을 감각의 촉수로 끌어내리고, 감각 기관에 포착된 느낌을 관념의 창고에 저장한다. 그에게 관념은 감각의 힘으로 분명해지고, 감각은 관념의 형태로 신뢰의 대상이 된다. 그는 사유와 느낌이 활력 없는 관념의 상태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것들이 감각의 순간성에 휘발되는 것을 싫어한다.
천고마비의 하늘,
시퍼렇다
비소 같다
청산가리 천 배
한 방울 마시면 즉사할 것 같은 독극물의 시퍼런 하늘
아청색 밤이 되었다
반달이 찰랑찰랑 떴다
퉁퉁 부은 젖
젖물이 뚝뚝 흐른다
젖 빠는 소리 요란하다
쭉쭉쭉
삶이 곧 죽음이구나
─「하늘의 혈청」 전문
그의 시에서 삶과 죽음은 관념의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소’처럼 ‘시퍼런 하늘’의 색깔로 오고, ‘젖물’처럼 ‘뚝뚝’ 흐르며 온다. 감각의 배에 실린 관념이 ‘독극물’과 ‘젖 빠는 소리’로 올 때,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에게 죽음과 삶은 관념이 아니라 감각적 관념으로, 감각이 아니라 관념적 감각으로 온다. 그에게 관념과 감각은 마치 종이의 앞뒷면처럼 분리 불가능하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관념과 감각 사이의 거리를 좁히게 할까. 쉽게 말하면, 그는 생각과 느낌이 따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에게 느낌 없는 생각은 가짜이며, 생각 없는 느낌은 허위이다. 그가 볼 때, 감각─관념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하나가 될 때, 진실성의 수위가 높아진다. 장인수에게 감각은 관념의 등을 가질 때 사상이 되고, 관념은 감각의 배를 가질 때 실체가 된다.
장인수의 관념은 늘 몸의 언어로 구현된다. 그는 몸에 오는 자극을 통해 관념을 얻고, 관념을 다시 몸으로 보내 실체화한다. 그는 자기 몸을 건드리는 자극을 중시한다. 그의 사유는 음식을 먹을 때, 아름다운 것을 볼 때, 근육을 움직여 힘든 노동을 할 때, 최대로 활성화된다. 관념은 그 자체로 그에게 잘 다가오지 않는다. 그는 감각의 경험을 통하여 관념을 확인한다. 그는 몸의 경험에서 정직과 진실, 실체와 기쁨, 그리고 유머를 발견한다. 감각계는 그에게 즐겁고 빛나는 해방구이다.
드넓은 뻘밭에
랜턴을 비추며
손금의 애정선처럼 갯골에 패인 물길
낙지의 빨판을 닮으리라
먹물빛으로 철썩이는 수평선
밀려갔다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당신과 평생을 함께하리라
서로의 유두에 점등을 하고
돌 틈에서 해삼을 발견하듯
옷고름을 더듬고
사랑의 뻘밭을 해루질하리라
멀리 비렁길 섬마을의
젖가슴 반달 긷는 집에 돌아가
밀려오는 밀물의
파도 소리처럼 끓어 넘치리라
─「해루질」 전문
장인수의 시들은 어둡고 우울한 관념의 골방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바람과 햇빛과 비와 눈물과 땀방울이 마구 뒤섞이는, 밝은 몸의 길에서 생산된다. 장인수는 몸이 빠진 깨달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감각─경험에 의해 체감되지 않는 관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인지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관념을 감각 기관의 경험을 통해 발효시키고 단련하고 정련한다. 그의 인식은 실천으로 검증된 이론처럼 단단하다. 그는 이질적인 것들을 마구 박치기시킨다. 그 기발한 발상들이 부딪힐 때 폭발하는 별처럼 생명성이 분출한다. 그의 시들은 생명성의 불꽃으로 가는 도화선이다. 그것들은 타오르며 경계를 넘고 터지며 더 큰 터짐으로 간다.